하로/글


종말 사태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러 사람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세상의 마지막 따위가 흥미로운 주제로 화두되지 않는다. 간간이 위신수가 다시 숲에 나타났다느니하는 뜬소문이 맴돌지만 그뿐이었다. 아마 누군가가 아주 커다란 마물을 착각한 거겠지. 오드는 햇빛을 피해 손으로 그늘을 만들며 앞을 응시했다. 주인이 제 고삐에서 손을 뗀 것을 알아챈 초코보는 혹시라도 그녀가 떨어질까 조심스레 균형을 맞추며 달렸다. 땅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달려온 길 위로 짓눌린 발자국이 남았고, 길 가장자리에서는 수풀 사이로 작은 정령들이 희미하게 빛을 내며 나뭇가지 사이를 오갔다. 오드는 그런 풍경을 바라보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분명 이 별이 전해준 예언대로라면 우리는 이리도 아름다운 숲을 뒤로 한 채 달로 도망쳤을 것이다...


나의 영웅나의 사랑하는 빛 그녀가 야만신으로 소환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날 가장 먼저 자원에 나선 것은 한 모험가였다. 아니,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녀 자신 뿐이라고, 그렇게 말했기에. 그녀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니 그녀가 토벌전을 꾸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많은 이들이 반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혹자는 무슨 자격이 있냐며 따져 물었다. 혹자는 희망을 저버릴 것이냐며 울부짖었다. 혹자는 어떻게 그런 용기를 가질 수 있느냐고 걱정했다. 그 모험가는 딱 한 마디 대답만 남겼다. 내가 사랑했던 그 빛까지 되돌릴 순 없으니까. 그 말을 할 때 모험가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누군가는 그리움이라고 했고, 누군..



오드, 잘 잤어? 일이 길어져서 말이야. 아무래도 내일까지는 여기서 머물러야 할 것 같아서.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줘. 조금 이른 아침, 창틀을 사뿐히 넘어온 햇빛이 침대 위를 비춘다. 이불 속에서 조용한 숨소리가 새어 나오고 반쯤 감긴 눈꺼풀 너머로 빛의 잔향이 아른거린다. 무어라 대답하자 링크펄 저편에서 낮고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다정해 보이는 대화가 몇 마디 오간다. 이윽고 통신이 종료되었다는 신호음이 짧게 울린다. 집 안은 다시 고요해지고, 오드는 링크펄을 손에 쥔 채 한참을 누워 있었다. 가벼운 잠투정과 함께 몸을 뒤척이자 침대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베개가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덮고 있던 하얀 천을 품에 가득 안고서는 얼굴을 묻는다. 손가락 끝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