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가 수칙 제 10조 26항: 의뢰 수행 시 불필요한 장난은 삼가십시오!
종말 사태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러 사람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세상의 마지막 따위가 흥미로운 주제로 화두되지 않는다. 간간이 위신수가 다시 숲에 나타났다느니하는 뜬소문이 맴돌지만 그뿐이었다. 아마 누군가가 아주 커다란 마물을 착각한 거겠지. 오드는 햇빛을 피해 손으로 그늘을 만들며 앞을 응시했다. 주인이 제 고삐에서 손을 뗀 것을 알아챈 초코보는 혹시라도 그녀가 떨어질까 조심스레 균형을 맞추며 달렸다. 땅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달려온 길 위로 짓눌린 발자국이 남았고, 길 가장자리에서는 수풀 사이로 작은 정령들이 희미하게 빛을 내며 나뭇가지 사이를 오갔다. 오드는 그런 풍경을 바라보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분명 이 별이 전해준 예언대로라면 우리는 이리도 아름다운 숲을 뒤로 한 채 달로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우리가 바꿔 버린 과거의 이야기. 툴라이욜라로 향하는 출항일이 다가오기 전까지, 빛의 전사 오드와 그녀의 연인 하르드스튀른은 여느 때처럼 검은장막 숲에서 의뢰를 해결하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정령의 가호를 듬뿍 머금은 숲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그날처럼 여전히 찬란하고 눈부신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흙내음과 풀 향기가 감돌았고, 어디에선가 모그리들이 조그맣게 재잘거리는 듯했다. 어느새 초코보에서 내린 채 나뭇잎을 바스락 밟으며 숲속의 길을 따라가던 오드는 문득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여기였죠? 처음 만났던 곳."
그 옆을 나란히 걷던 하르드스튀른은 화살통을 허리춤에 단단히 고정하며 대답했다.
"그러게. 그때 내가 궁술지도도 맡았었는데⋯. 오랜만에 활솜씨나 볼까?"
"아쉽게도 안 가져왔어요."
"바꾸면 되지. 네 총을 내가, 내 활을 네가."
오드는 예의상 머뭇거리더니 이내 재미있겠다는 듯 눈을 빛냈다.
"해볼까요?"
대화가 이어지는 것도 잠시, 숲 속 깊은 곳 오래된 바위와 거대한 뿌리들이 어우러진 공간에서 마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성한 덤불 사이에서 붉은 눈이 번뜩였고, 스산한 바람이 스쳐 지나가면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것은 자신을 토벌하러 온 불청객들을 경계하듯 뚫어져라 응시했다. 숲속의 작은 생물들이 주변에서 잔잔히 떨리는 기척을 보이며 물러났다. 그러나 이를 눈치챘음에도 두 사람의 신경은 한창 다른 데로 쏠려 있었다.
"이거⋯ 제법 무겁네요."
"하하."
오드는 거대한 장궁을 들고 시험 삼아 시위를 당겨 보았다. 그녀의 손끝에서 활이 미세하게 떨렸고, 어깨에는 예상보다 훨씬 무거운 장력의 압박이 느껴졌다. 하르드스튀른이 주로 사용하던 활의 설정은 대강 이러하다. 전체 길이 280cm, 당기는 데 필요한 힘은 약 200kg, 화살의 길이는 160cm. 이 정도면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 쓰는 활이 아닌가 싶겠지만 실제로 하르드스튀른에게 주어진 여러 칭호 중 '미친 곰'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마냥 과장이라고만 생각하지는 못할 일이다. 하르드스튀른은 오드의 포말하우트를 한 손으로 돌리며 능숙하게 조준 자세를 잡았다.
"어디 보자, 퀸을 불러내는 게⋯."
"하나하나 들여다 보는 사이에 끝날지도 몰라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오드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힘껏 시위를 당겼다. 화살촉을 겨누는 팔에 살벌히 힘이 들어가고 시선은 초점이 향하는 곳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이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에 깃들고,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면서 숲은 잠시 조용해졌다.
그 순간, 우거진 수풀 사이로 형형히 빛나던 눈동자가 깜빡였다.
쿵.
묵직한 주머니를 카운터에 올리자 맞은편 남성의 이야, 하는 감탄사와 함께 호탕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이렇게 빨리 해결해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걸. 역시 맡기길 잘했다니까!"
"자잘한 마물 소탕이야 금방이죠. 더 필요한 건 없으세요, 버스카론 씨?"
"이게 다야, 고생했어. 떠나기 전에 인사할 겸 한 번 더 들러줘."
언제나처럼 사람 좋은 인상을 물씬 풍기는 버스카론은 손을 휘 내저으며 이제 됐으니 돌아가도 좋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삐걱이는 나무로 된 문을 열고 나와 돌아본 버스카론 주점은 몇 년 전 그 모습 그대로 은은한 등불이 걸려 있고, 너덜너덜한 모험가 전단지가 벽면에 마구잡이로 붙어 있었다. 커다란 나무로 지어진 이곳에서는 깊은 숲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이 가볍게 주변을 감싸며 향긋한 숲의 내음을 흩뿌렸다. 오드는 버스카론에게 건네받은 보수를 주섬주섬 챙기며 물었다.
"다음 의뢰는요?"
하르드스튀른은 오드를 내려다보며 팔짱을 낀 채 씩 입꼬리를 올렸다.
"무려 쌍사당에게 부탁 받은 의뢰야. 우리 말고는 적임자가 없을걸."
"이러니까 전역하고도 대령님 소리를 듣는 거예요. 여전히 이렇게나 관심을 두는 걸 보면 아마 평생⋯."
오드가 작게 한숨을 쉬자 하르드스튀른이 웃음을 터뜨리며 저 멀리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제 초코보에게 손짓했다.
"얼른 움직이자, 오델린. 아직 남은 의뢰가 한참이야."
두 사람은 다시금 숲으로 향해 쌍사당 경비초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검은장막 숲은 언제나 푸르고도 깊은 생명의 숨결을 머금고 있었다. 머리 위로 드리운 나무들의 무성한 가지들이 촘촘히 장막을 이루어 그 사이로 햇살이 조각난 금빛처럼 쏟아져 내렸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잎사귀들이 속삭이는 듯한 소리를 내었고, 땅을 덮은 이끼와 꽃들이 가벼운 이슬을 머금고 있었다.
하르드스튀른은 초코보에서 내리자마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대원들이 보초를 서고 있는 감시초소로 걸어갔다. 오드는 의아해하며 그녀의 팔을 붙잡았으나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초소에 있던 대원들은 저벅저벅 다가오는 하르드스튀른을 발견하자마자 잔뜩 긴장한 채 허리를 곧게 피고 양팔을 겹쳐 눈 높이까지 올렸다. 한 치의 떨림 없이 아주 완벽하게 각이 잡힌 듯한 모습이었다.
"대, 대령님!"
하르드스튀른은 흐뭇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요즘은 별일 없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 곁에 있던 하르드스튀른이 어느새 초소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시시콜콜한 잡담을 던지고 근황을 묻는 모습이 보이자 오드는 제 이마를 짚었다. 이에 더불어 민간인 — 물론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상사였다 — 이 대뜸 찾아와 얼쩡거려도 잡아갈 생각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더해지니 아주 가관이었다. 몇 마디 오가는 것도 잠시, 금새 다가온 오드는 하르드스튀른을 올려다보며 두 손을 제 허리에 올린 채 물었다.
"하르, 정말 의뢰 받은 거 맞죠?"
"어쩌면?"
하르드스튀른은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전역한 대령이 와서 후배들을 괴롭히면 쓰나요?"
"아니, 나는 그냥 잘 지내나 궁금해서~"
능청스럽게 웃으며 대원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하르드스튀른을 보자, 오드는 결국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못 말린다니까.
"가시죠, 대령님. 초소장님께서 눈치를 보고 계시잖아요."
하르드스튀른은 못 이기는 척하면서도 씩 웃으며 따라나왔다.
"알겠어, 알겠어~ 후배 사랑이 넘치는 거라고 생각해 줘."
두 사람은 초코보를 타고 다시 숲길을 따라 나아갔다. 길가의 나무들은 서로 얽히고설켜 싱그러운 초록빛 터널을 이루었고, 공기에는 풀 내음과 우거진 나무들의 은은한 향이 감돌았다. 푸른빛으로 일렁이는 정령들이 강가를 따라 바람에 휩쓸리듯 떠다녔고, 지나온 길 옆으로 작은 들꽃들이 살랑였다. 하르드스튀른은 한참을 달리다가 문득 속도를 늦추며 오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때? 오랜만에 이렇게 의뢰 받으며 돌아다니는 거."
하르드스튀른이 대뜸 묻자, 오드는 제 연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햇살이 반짝였다.
"좋아요. 예전보다 더, 아주 많이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검은장막 숲은 변함없이 푸르게 아름답고,
이는 둘의 모험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