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별에게
오드, 잘 잤어?
일이 길어져서 말이야. 아무래도 내일까지는 여기서 머물러야 할 것 같아서.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줘.
조금 이른 아침, 창틀을 사뿐히 넘어온 햇빛이 침대 위를 비춘다. 이불 속에서 조용한 숨소리가 새어 나오고 반쯤 감긴 눈꺼풀 너머로 빛의 잔향이 아른거린다. 무어라 대답하자 링크펄 저편에서 낮고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다정해 보이는 대화가 몇 마디 오간다.
이윽고 통신이 종료되었다는 신호음이 짧게 울린다. 집 안은 다시 고요해지고, 오드는 링크펄을 손에 쥔 채 한참을 누워 있었다. 가벼운 잠투정과 함께 몸을 뒤척이자 침대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베개가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덮고 있던 하얀 천을 품에 가득 안고서는 얼굴을 묻는다. 손가락 끝에 닿는 감촉이 허전하다.
그리고 나지막이 부르는 한 사람을 향한 호명.
" ⋯하르."
아무도 듣지 못할 속삭임이 맴돌다 금세 사라진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을 네 이름을 중얼거린다. 텅 빈 방, 허전한 빈 자리, 혼자 남겨진 하루. 동거인이라지만 각자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날이 엇갈려 그간의 안부는 탁자 위 편지로 물어 대신하는 게 전부였다. 며칠 집을 비우고 돌아왔을 때 제가 쓴 편지가 그대로 놓여 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괜히 의뢰 중에 방해가 될까 싶어 서로에게 연락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것이 두 모험가가 서로를 위하는 방식이었다.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아쉽다, 일 때문이라니 어쩔 수 없지.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같이 하고 싶은 것도, 해주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지만 다음으로 미루면 그만일 테니. 네가 있었을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다 눈을 감는다. 침대는 종족을 무관하고 다 큰 성인 둘이 누워도 넉넉할 만큼 크다. 혼자 누워있자니 오늘따라 유독 더 비어 있는 느낌이다. 창문 틈으로 밀려 들어온 바닷바람에 공기가 차다.
종말 사태가 벌어진 이후로부터 오랜만에 여유로운 하루를 보냈다.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 직접 요리도 하고, 검은장막 숲으로 도도와 함께 산책도 다녀오고, 혼자서 집 앞 해변도 거닐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시장도 둘러보고, 이제는 바다가 잘 보이는 창문 앞에 앉아 해가 저무는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금빛 물비늘이 눈동자 속에서 반짝인다. 저 멀리 커다란 배 한 척이 멀어져 가고, 파도가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평화롭고 잔잔한 하루였다.
침대에 걸터 앉은 오드는 왼손 약지를 바라본다. 며칠 전부터 네가 집으로 돌아오면 꼭 얼굴 보고 전해주겠다고 마음먹은 말이 있었는데, 나름 계획도 세워뒀는데, 이른 아침부터 날아온 — 바쁘니 다음에 보자 — 말 덕분에 시도조차 못해보고 실패했다.
오드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반지를 보며 다시 한참을 고민한다. 준비했던 일정이 무산되어 언제 올지도 모르는 너와의 하루를 기다리기엔 제 마음이 급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조용한 집 안에 링크펄 통신음이 울린다.
"하르, 바빠요?"
"아니, 지금은 괜찮아. 무슨 일 있어?"
"보러 가도 될까요?"
직접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링크펄 너머로 동의하는 짧은 대답이 들려옴과 동시에 오드는 반지를 손 안에 꼭 쥐고 눈을 감는다.
몸이 가벼워지는 감각.
공간이 부서지듯 흐트러지고
다시 감았던 눈을 떴을 때,
그곳은 북해 제도의 올드 샬레이안 — 눈 내리는 잿빛 항구의 끝자락.
그녀가 저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오드는 '혼자'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믿었다. 외로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녀에게 고독은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언제나 그녀의 곁에는 사람들이 있었. 동경과 질투, 연민과 애정, 때로는 증오 섞인 시선까지.
그러나 모든 것이 사그라든 깊은 밤, 창가에 기대어 별이 촘촘히 박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면 비로소 그녀는 제 고독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슬픔도, 우울함도 아니었다. 오히려 조용한 기도에 가까웠다. 먼저 별의 바다로 떠난 이들에게,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한 번, 사랑하는 동료들을 위해 두 번, 그리고 사랑하는 모든 것을 위해 세 번.
오드에게 사랑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로맨스 소설 속 주인공들이 나누는 불꽃 같은 감정이 아니라, 더없이 잔잔하게 스며드는 마음. 따뜻한 물결처럼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그녀를 감싸는 감정. 오드는 그렇게 세상을 사랑했다.
그런 그녀가 검은장막 숲에서 한 모험가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바람을 쐴 겸 나선 길에서, 마물에게 둘러싸인 짐마차를 돕게 된 것이 계기였다. 늘어나는 적을 직감하고 활을 고쳐 잡으려던 순간, 어디선가 빗발치는 화살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들자, 얇은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붉은 머리칼을 품은 실루엣을 비추고 있었다.
낯선 얼굴. 대화 한 마디조차 나눌 새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둘의 움직임은 익숙한 호흡처럼 조화를 이루었다. 처음 보는 이인데도 마치 오래도록 함께 싸워온 동료처럼.
도와주러 온 모험가인가? 이런 적은 처음이야. 오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이상하리만치 겁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람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해 평소보다 조바심 가득한 마음으로 싸움을 이어나갔다. 기쁘게도 상대 역시 같은 감정을 품었는지, 짐마차를 정리한 후 다가와 이름을 물었다. 오드, 그리고 타라. 그렇게 통성명을 나눈 뒤 두 사람은 함께 그리다니아로 돌아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디서 왔는지, 언제부터 활을 쥐었는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어디인지, 버디 초코보의 이름은 무엇인지.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 사이로 서로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섞여들고, 둘의 등 뒤로는 여러모로 모험가다운 대화가 늘어졌다. 그랬던 그이가 사실 쌍사당 소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이것이 그녀와의 첫 만남이었다.
타라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
배울 점이 많았고, 믿음직했으며, 오드는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기댈 수 있었다. 둘은 함께 의뢰를 해결하는 것 외에도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았다. 속내를 쉽게 털어놓지 않던 오드였지만, 타라와 걷는 동안에는 묘하게 기분이 들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리고 타라는 언제나 호탕한 웃음으로 그것을 받아주었다. 과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내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을. 이는 오드가 평범한 모험가에서 어느새 영웅으로 칭송받기 시작했을 때에도, 온갖 흉흉한 음모와 소문에 휘둘릴 적에도, 제 1세계로 넘어가 오랜 시간 — 물론 두 세계의 시간은 다르게 흘렀지만 — 자리를 비웠음에도 여전했다.
그럴 때면 오드는 오래 전 가족들과 함께한 순간들을 떠올리곤 했다. 기억의 가장 깊은 곳, 어렴풋이 쌓여 있던 따뜻한 시간들. 그만큼 타라를 사랑했다. 이름을 붙이기에 모호한 감정이었지만,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타라와 둘이서 더 오래 함께하고 싶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망설임 없이 물었더랬다. 제 가족이 되어주겠냐고.
모험가로서의 언약식을 올리고 함께 살게 되면서, 오드의 삶은 이전과 확실히 달라졌다. 혼자 살던 시절의 집은 단순한 쉼터에 불과해 오래 머물지 않았고, 자주 비웠으나 이제는 달랐다. 서로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고, 나갈 때는 배웅하며, 돌아오면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이 있었다.
오드가 단 것을 좋아한다는 걸 알아버린 타라 덕분에 부엌에서는 단내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오드는 그런 그녀가 요리를 잘한다는 것도, 깊이 잠들면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지만 정해진 시간에는 정확히 눈을 뜨는 것도, 그리고⋯ 경제관념이 전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굳이 말하고 싶지 않지만.
오드는 타라에게 자신의 본명을 알려주었다. 별바다 너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이 언젠가 다시 불러줄 그날을 위한 이름. 지금껏 누구도 모르게 숨겨왔지만, 새 가족이 되어준 사람에게만큼은 보답으로 전하고 싶었고, 그런 그녀에게 타라 또한 제 이름에 담긴 의미를 알려주었다.
"하르드스튀른. 다정한 별이라는 뜻이야."
멋쩍은 얼굴로 의미를 덧붙이는 그녀를 바라보고, 오드는 웃으며 대답했다.
"다정한 별. 정말 뜻 그대로네요."
그 뒤로 오드는 타라를 '하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동거인을 향한 애정이 듬뿍 담긴 애칭이기도 하겠거니와, 무엇보다 '다정한 별'이라는 의미가 굉장히 마음에 든 것이 이유에서였다.
하르드스튀른은 오드에게 별과 같은 존재였다. 어린 모험가 시절, 마음이 불안할 때마다 위안을 얻던 존재. 어둠 속에서도 나아갈 방향을 잃지 않게 해주는 북극성.
그리고 지금, 그녀는 오드의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해 주고 있었다. 오드는 그런 다정한 별을 사랑했다.
하루는 집에 돌아와 보니 하르가 바닥에 책을 잔뜩 늘어놓고 마법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다. 공부라기보단 책에 적힌 모든 걸 달달 외우는 것에 가까웠지만. 오드는 한참을 그녀를 바라보다가, 간식을 챙겨 와 그녀의 곁에 앉았다. 오븐에서 나온 지 한참 지나 퍼석해진 마들렌.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라면야 너무 맛있어서 책보다 간식에 정신이 쏠린 것이 문제였다. 마지막 남은 마들렌 반 조각을 제 옆에 있는 독서광 입에 밀어 넣고서는 손에 잡히는 아무 책이나 집어 들었다. 그러나 역시 마법과는 맞지 않는 건지, 몇 페이지도 채 넘기지 못하고 깜빡 졸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뻐근한 목을 기울이며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호기롭게 페이지를 넘기던 하르 또한 어느새 책을 떨군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감긴 눈과 살짝 벌어진 입술, 뺨에 남은 흉터, 아슬아슬 금방이라도 코에서 미끄러져 떨어질 것만 같은 안경.
오드는 곤히 잠든 그녀를 침대로 옮겨 두고도 한참을 옆에서 바라보다, 그 곁에서 다시금 눈을 감았다.
어느 날 거실 소파에 앉아 따뜻한 차를 홀짝이고 있자니, 문득 모험가 소대원에게 받은 질문이 떠올랐다.
대위님은 좋아하는 사람 없으세요?
가볍게 웃으며 넘긴 말이었다. 평소처럼 주고 받던 일상적인 대화로 흘러 넘겼지만, 그 말은 돌고 돌아 다시금 제 가슴을 톡톡 건드렸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연애, 그리고 사랑. 관심을 가져본 적도, 직접 경험해 본 적도 없었지만 어쩐지 자꾸만 머리 안을 맴돌고⋯
그때, 문득 하르의 얼굴이 떠오른다. 잔뜩 신이 나서 버디 초코보를 소개해주던 모습, 산책하며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주던 눈빛, 아침에 눈을 뜨면 보이는 얼굴, 그리고 다정하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던 목소리까지. 이상하리만치 좋았다. 찻잔이 접시와 가볍게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좋아하는 사람.
오드는 제 감정에 이름을 붙였다.
이건 모두에게 줄 수 있는 그런 사랑이 아니었다.
마음을 자각한 뒤의 며칠은 그야말로 회피의 연속이었다. 도저히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하르가 이 감정을 부담스러워하면 어쩌지. 혹여 거리를 두면, 이전처럼 함께 있을 수 없게 되면?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를 피해 다녔다. 핑계를 만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하지만 다정한 상대는 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괜찮아? 어디 아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묻는 하르에게, 오드는 그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보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오드는 혼란스러웠다. 하르가 저를 사랑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같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일부러 거리를 두었다. 지금까지 쌓아온 관계를 망칠 수도 있다는 불안함이, 감정을 인정하는 것보다 더 무서웠다. 그만큼 하르는 오드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이었으니까.
누군가에게 이런 마음을 품는 것이 처음이었던 탓에 오드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속으로 앓기만 할 뿐이었다. 물론 언젠가는 눈치 빠른 하르가 알아채리라는 것은 저도 잘 알았기에 끝까지 숨길 생각은 없었다. 오드는 그전에 먼저 자신의 마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서로 바빠 며칠 동안 보지 못했던 나날, 오드는 하르가 돌아오는 날에 맞추어 계획을 세웠다.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좋은 분위기 속에서, 그녀를 마주 보고, 솔직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렇게 다짐했던 계획은 지금 시점에서 이미 무너지고 말았지만.
"여기 있다고 미리 말해줄걸. 추울 텐데."
오랜만에 본 당신은 여전히 다정하다. 눈이 내리는 항구는 바닷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들 만큼 시리고 차갑다. 하지만 지금 손도, 마음도 덜덜 떨리는 건 아마 추위 때문만이 아니겠지.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외투를 벗어 어깨에 얹어주고.
"그래서, 할 말은 뭐야?"
상냥한 목소리가 맴돈다. 잠시 마주한 시선이 이내 다시 내려앉는다. 얼굴을 보고 말할 용기는 여전히 없다. 한순간의 결심으로 무작정 찾아왔지만, 막상 앞에 서니 한마디조차 꺼내기가 어려울 뿐이다. 조용히 기다리는 당신이 어색해 괜히 헛기침을 하고, 손가락을 꼼질거린다. 차갑게 얼어 감각이 무디다.
"저,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계속 뜸을 들이다 겨우 입을 연다.
"그동안 계속 생각해 봤는데, 지금 말하지 않으면 분명 후회할 것 같아서요."
그마저도 한 마디를 전하고, 입을 다물기를 여러 번이다. 드문드문 흐르는 침묵의 공백을 파도소리가 채운다. 차가운 바람이 둘 사이를 휘 지나간다. 옅은 입김이 바스라지고 목소리가 잘게 떨린다.
"사실 숨길 수만 있다면 그러려고 했어요. 알게 되면 서먹해질까 봐, 지금 이 관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 근데 그게 아니었나 봐요. 자꾸만 욕심이 나요. 당신에게 지금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
심장이 미칠 듯이 뛴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간다.
미리 생각해 둔 말이 있었는데. 도도 앞에서 여러 번 연습도 해봤는데. 당신 앞에 서자마자 전부 무용지물이 된다. 한 번 입을 열자 정리되지 않은 말들이 쏟아지려 한다. 소리는 점점 기어들어가고, 머리는 새하얀 눈발로 뒤덮여 갈피를 못 잡을 지경이다. 하지만 이 순간을 놓쳐선 안 돼.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마음 한 구석에 꾹꾹 눌러두었던 말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레 건넨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목이 메어 마른 입술을 몇 번이고 벙긋거리다가 도로 닫는다. 울면서 고백하는 건 정말이지 최악의 상황이 될 거야. 참고 또 참으며 울렁이는 속을 겨우 삼킨다. 이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가. 얼마나 많이 겁먹고, 부정하고, 도망쳤던가. 그러나 눈이 마주칠 때마다 틈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이 감정은, 이제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무겁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시선을 든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네 손가락 위 반지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좋아해요, 하르."
"정말 많이 좋아해요."
차가운 공기 위로 따뜻한 마음이 하얗게 흩어진다. 시린 추위에 바보처럼 붉어진 얼굴로 그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이윽고 가슴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올라와, 급하게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려는 찰나 몸이 제 앞으로 확 기운다.
하르드스튀른은 이내 웃음을 터뜨린다. 간질간질한 마음이 터져 나온 듯한 웃음이다. 그러고는 제 앞의 상대를 온전히 안아준다. 이제는 가녀린 바닷바람조차 스며들 틈이 없다.
"⋯고마워."
"나도, 오드가 좋아."
별이 다정하게 빛난다.
그 빛의 이름은 분명 사랑이었다.